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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시간 전

‘오디세이’, 고뇌하는 ‘남성 영웅’과 틀에 갇힌 여성들

최초 작성: 2026.08.20 01:56
최근 업데이트: 2026.08.21 02:49 (16시간 전)

[유해한 영화읽기] 영화 ‘오디세이’ 죄책감 시달리며 현실 도피하다 타락한 세상 직시하는 ‘남성 영웅’ 가부장적 나르시시즘과 성녀-창녀 이분법 한계는 못 넘어

‘오디세이’, 고뇌하는 ‘남성 영웅’과 틀에 갇힌 여성들

영화 '오디세이' 스틸.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번에도 세상의 운명을 매듭짓고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귀환하는 영웅 서사(노스토스)에 작품 전부를 할애한다. 당당한 지략가 오디세우스가 아니라 죄책감에 시달리며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오디세우스를 내세운 '오디세이'는 종반부에 가서야 비로소 그가 직시하길 거부하던 트로이 멸망의 밤을 재연한다. 그날 그는 트로이 해변에서 10년을 썩은 부하들의 분노가 한 도시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것을 보았다. 무고한 시민이 남녀노소 도륙당하고 강간당하는 참상을 보았다. 그는 지혜의 신이 내린 가호인 줄 알았던 환시도 실은 자기 죄를 영원히 각인시키고자 하는 양심의 징벌이었음을 깨닫고 만다. '오디세이'가 천천히 고통의 근원에 다가가는 걸음마다 놀란의 전작들이 그림자를 드리운다. '오펜하이머'의 오펜하이머는 핵무기를 구상하며 바가바드기타의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를 외고, '테넷'의 '주도자'는 아무도 모르게 3차 세계대전 발발을 막고 현세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춘다. 사실상 '인셉션'과 '인터스텔라'도, '다크나이트' 시리즈의 완결편도 모두 같은 노선을 따른다. 놀란의 주인공과 대적자 남성들은 전부 세상의 흥망이 자기 손에 달려있다는 중압감에 짓눌리고 있으며, 압도적 파괴나 구원을 행하는 신을 참칭하기도 한다. 놀란이 빚은 대다수의 주인공이 이 세상의 부패에 일정 정도 책임감을 느끼는 1세계 백인 남성이라는 점은 분명 특기할 만하다. 어떤 면에서 놀란은 기원전 그리스 서사시의 교훈을 빌어 작금의 인류세를 다시금 환기하려는 듯도 하다. 환대의 법칙에 기대던 질서는 사라지고 바다를 건너온 침략자와 내부의 앙심이 공동체를 서서히 좀먹고 있다는 위기감은 지금 여기에서도 자주 활용되는, 그만큼 단순하고 유용한 정치적 정동이기 때문이다. 그 자신부터 미케네 문명 붕괴 이후 암흑기의 후손이었던 호메로스는 같은 처지의 그리스인 난민들을 위무하기 위해 '오디세이'와 '일리아스'를 비롯한 여덟 편의 노래를 불렀다고도 전해진다. 그렇다면 과거 문명의 광휘를 끊임없이 되새기며 회귀를 도모하려는 태도야말로 호메로스의 원전에 가장 충실한 재해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임감은 구조화된 환부에 칼날을 겨누는 대신 예외 없이 예수를 방불케 하는 자기희생적 반추로 이어지고 만다. 그래서 놀란의 남성 주인공들이 지닌 고뇌의 이면에는 언제나 종말을 인질 삼은 과대망상적 나르시시즘 비슷한 것이 떠돈다. 종말의 구체적인 형태나 원인보다도 멸망으로부터 인류를 구한 나의 위대함, 혹은 구해낼 수도 있었던 나의 비애가 더 중요하다는 인지다.

‘오디세이’, 고뇌하는 ‘남성 영웅’과 틀에 갇힌 여성들

무려 세계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남성의 고뇌에 매료된 감독 대신 현대의 관객이 던져야 할 질문은 다른 것이다. 과연 이것이 지킬 가치가 있을 만한 세상이던가? 붕괴 이후에 올 다음 세상은 그러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가?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탐욕스러운 돼지로 만든 키르케는 하나의 답을 제시한다. "인간의 탈을 쓴 모습으로 돌아와." 인간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닌 '인간의 탈을 쓴 모습'으로 돌아오라 주문하는 지점이 중요하다. 단지 집에 가고 싶을 뿐인 불쌍한 사내들이라며 부하들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오디세우스에게, 키르케는 10년 이상 강간과 살인과 약탈을 일삼은 그들이 원래부터 짐승만 못했다는 진실을 모르는 체하느냐고 일갈한다. 죽었든 살았든 그 남자들 거죽 밑의 본성은 훨씬 저속하고 욕되고 폭력적인 무엇이라는 점을 '마녀' 키르케는 잘 알고 있다. 오디세우스는 일종의 대속을 추구하는 순례자를 자처하지만, 결국 그가 바라는 회복조차 이렇게 썩은 세상에서 다른 방식으로 썩은 세상으로의 이행을 가리킬 따름이다.

‘오디세이’, 고뇌하는 ‘남성 영웅’과 틀에 갇힌 여성들

게다가 타락한 세상에 전하는 경고가 너무나 엄중한 나머지, 지배적 논리에서 처음부터 빗겨가 있었던 욕망과 주목받지 못한 위대함은 당연하다는 듯 잊히고 있다. 여성 인물을 살로메나 카르멘 계열의 위험한 팜므파탈 대 현명한 가정의 천사라는 대립 구도 안에서만 상상하는 건 놀란의 오랜 버릇이다. 그간 작품 외부의 변화를 어느 정도 의식한 선택인지, 전쟁을 신의 탓으로 돌리는 남성 지배계급의 책임 회피를 키르케, 헬레네, 페넬로페의 대사 몇 줄이 살며시 꼬집는 것처럼 보이긴 하나 여전히 한계가 명확하다. 페넬로페는 "내가 통치한 세월이 네 턱에 난 수염 몇 올보다 별 게 아니란 말이냐"며 아들을 몰아세우다가도, 어머니는 무엇을 원하는 거냐는 텔레마코스의 질문에 결국 "오디세우스를 원해!"하고 돌아서고 만다. 남성의 편의대로만 상상된 이 여성은 결국 대여한 권력의 지속에도,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는 새로운 규율의 확립에도 관심이 없다. 남편의 대의에 자기 삶을 귀속시키며 어서 다시 그의 소중한 재산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한편 호메로스 원전에서 신전에 살던 키르케, 신들의 딸이며 그 자신도 한 섬의 왕으로서 숱한 시종을 거느렸던 칼립소 역시 놀란의 '오디세이'에서는 완벽하게 홀로 된 오두막의 자연인처럼 묘사된다. 누추하고 고립된 환경의 여자여야만 이방의 남자를 향한 연심이 설득력을 얻고, 여성 동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외로워야만 애정이 더 돋보인다는 사실을 이제는 남성 창작자들도 이해하기 때문일까. 심지어 영화 속 키르케는 싸움이 잦다는 이유로 유일한 혈육인 언니를 까마귀로 둔갑시킨 채다. 현실에서 남성 폭력의 침투를 그토록 혐오하고 두려워하며 안전지대를 구축한 여자가 고작 그런 이유로 가장 가까운 여성연대의 가능성을 포기할 확률은 극히 낮다.

‘오디세이’, 고뇌하는 ‘남성 영웅’과 틀에 갇힌 여성들

미심쩍은 키르케의 선택은 다시 페넬로페가 시녀 멜란토의 눈앞에서 문을 닫아버리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영화는 멜란토가 구혼자 안티노오스와 통정하며 첩자 노릇을 했단 걸 알아챈 페넬로페가 마땅한 권선징악을 행했다는 뉘앙스를 취한다. 반면 사반세기 전 마거릿 앳우드의 『페넬로피아드』는 멜란토처럼 가장 어여쁘고 젊은 시녀들에게 페넬로페가 몰래 정탐의 임무를 맡겼다고 가정하며 그들이 왕비를 위해 일부러 구혼자들과 가까이 지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가장 낮은 곳에서 희롱당하고 매 맞는 일이 예사였던 하녀들이 페넬로페의 생존을 오랜 세월 도운 최측근이 아니겠냐는 상상이다. 돌아온 오디세우스에게 주인을 배신한 음녀로 몰려 항변의 기회 없이 죽임당한 열두 명의 시녀들을 저승에서도 찾아다니며 제 딸처럼 애도하는 앳우드의 페넬로페와, '너는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라'며 멜란토를 사지에 내버려두고 어딘지 후련한 표정을 짓는 놀란의 페넬로페를 보라. 이 간극, 이 무지의 반복, 2000년도 더 전에 쓰인 원전에서 비어져 나오는 여성혐오( misoginy )를 제대로 '단도리'하지 못하는 '재해석'이 현시대 가장 위대하다는 남성 창작자의 게으름을 증명하고 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310/0000139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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